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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7년간의 기러기 생활을 정리하고 가족이 있는 밴쿠버로 떠났다. 아내는 이민 생활 5년 만에 랜트 아파트 생활을 청산하고 아담한 주택 하나를 구매해 놓았다. 동네는 도심에서 약간 벗어난 주택단지로 주변에는 상업지역이 없어 비교적 깨끗하고 조용하다는 것이 주택을 마주한 첫 느낌이다. 전주인은 교장 선생님으로 정년퇴임을 하시고 오랫동안 노부부가 살았다고 한다. 오랫동안 정성스럽게 가꾸어 놓은 정원은 수고스러운 노부부의 손길이 묻어 있는 선물과도 같은 곳이었다.
옆집과는 적당한 간격을 유지하고 있고, 근접해 있는 다른 주택과는 달리 집의 크기와 모양새가 비슷하게 닮았다. 시차 적응 기간을 보내고 옆집과 간단한 인사를 나누었다. 옆집 주인은 밥(Bab)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제임스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나의 영어 이름보다 훨씬 기억하기 쉽고 간편한 이름이다. 그는 튀니지라는 국가에서 이민을 왔다고 한다. 튀니지는 북아프리카 지역에 있는 국가 중 하나라고 한다. 그는 밴쿠버로 이주한 지 27년째를 맞이하고 있었다. 우리 가정의 이민 연차와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이민 생활의 깊이와 연륜이 묻어 있다. 언어 또한 이민 생활에 전혀 불편함 없이 소통 가능한 가정이라는 점에서 한층 더 부러움을 산다. 아내는 주택으로 이사 온 이후 옆집과 아직 한 번도 정식으로 인사를 나눠 보지 못했다고 했다.
밥(Bab)을 보는 순간 연배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두 가장의 아내들 또한 연령대가 비슷하게 느껴진다. 자녀 또한 두 집 모두 아들만 둘을 두고 있다. 자녀도 비슷한 또래인 듯한데 사춘기와 낯가림이 있는 시기라 새로운 환경의 교류를 원하지 않았다. 옆집과 인사를 나눈 이후의 소감은 이웃사촌으로 무난하게 관계가 이어져 갈 것 같은 예감 좋은 느낌을 받았다.
밥은 퇴근하고 나면 집 앞 가라지 문 앞에 의자를 가져다 놓고 휴식을 취하는 모습이 남달랐다. 그러한 그의 행동이 유일한 일과 중 하나인 듯했고, 그를 잠시 지켜보면서 익숙하지 않은 그의 낯선 행동이 무척이나 단조롭고 무료해 보였다. 어쩌면, 밴쿠버의 일상의 무료한 단면을 보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이웃 간에 인사는 나누었지만, 여전히 마음 한구석의 어색함 때문인지 다가서는 행동이 쉽게 옮기지 않았다. 아직 서로의 관심을 이끌만한 호기심이 없는 이유일 수도 있고, 개인의 생활을 굳이 들추어내지 않으려는 개인주의적인 성향이 짙은 캐나다 문화라는 환경 때문일 수도 있다.
여름철이 되면 하루가 멀다고 정원에 잔디가 오이 자라듯이 쑥쑥 자라난다. 휴일 이른 아침부터 동네는 온통 잔디 깎는 기계음 소리로 시끄러운 휴일을 보냈다. 밥은 정원에 잔디를 깎는 내내 마스크도 모자라 수건으로 입을 한 번 더 감싸고 잔디를 깎았다. 그의 모습이 보기에도 무척이나 힘들어 보였다. 작업 내내 거친 기침까지 동반하면서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이 역력해 보인다. 밥의 그러한 행동은 풀 알레르기 현상 때문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그가 정원을 정리할 때마다 힘겨워하는 모습을 알고 난 이후 우리 집 정원을 정리할 때 밥의 정원에 불쑥 자라난 잔디까지 함께 깎아주기 시작했다. 밥의 고통스러움을 대신하여 성장한 아들들이 아빠의 정원 일을 대신 도와줄 만도 한데 부모는 자식까지 정원 정리에 동원하는 것이 싫었던 것 같다. 부모가 자식 사랑하는 마음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밥의 정원에 잔디 깎는 일을 도와주기 시작하면서 밥과 급속도로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어느 날 갑작스럽게 밥(Bab)은 자신의 집으로 저녁을 초대했다. 생소한 튀니지 음식으로 한 상 푸짐하게 차려냈다. 사실 처음 먹어보는 음식이라 손과 입의 움직임이 어색할 정도로 낯설게 움직이고 있었다. 밥은 포크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고 있는 표정이다. 일반적인 캐나다 음식과는 달리 생전 먹어 보지 못한 이방인 나라의 전통 음식이기 때문에 젓가락의 움직임이 순간순간 주춤거려졌다. 맛이 다소 생소하기도 하고 향신료 냄새가 짙은 음식은 체내에서 거부 반응을 가져왔지만, 정성과 고마움의 답례로 맛있게 먹고 있다는 표정관리에 곤욕을 치른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식사를 함께하면서 자연스럽게 주제 없이 긴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누었다. 식사 초대를 한다는 것은 상대의 관심이 커지는 시작의 단계이다. 밥(Bob)은 식사 도중 자유스럽게 자신의 직장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었다. 회사가 매우 안정적이고 밥은 어느 정도 중견 임원 정도의 위치를 지키고 있다는 느낌을 대화 속에서 느낄 수 있었다. 밥은 회사 이야기를 할 때마다 말끝에는 자신감 있는 강력한 활력이 넘쳐나고 있었다. 밥은 회사 이야기를 나누다가 갑자기 솔깃한 말 한마디를 던졌다. 혹시라도 자신의 회사에 와서 일할 의사가 있다면 입사 가능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겠다고 했다. 이보다 솔깃한 말은 없었다.
한국 생활에서 혼자 기러기 생활을 하고 있을 때 아내와 애들은 가족이 어디에 살든 함께 살길 원했다."w준우아빠 캐나다에 오면 무슨 일이든 할 일이 없겠어요"아내의 이 한마디가 왠지 모를 용기와 힘을 실어주었다. 부딪쳐보자 사람 사는 세상 별반 차이 있겠느냐는 자신감은 별다른 동요 없이 즉흥적일 정도로 단시간에 이민을 결정했다. 아내의 말에 힘과 위안을 얻어 아무런 대책 마련도 없이 무작정 밴쿠버행 비행기에 올라섰다.
기러기 생활 7년 동안 휴가기간을 이용하여 한국과 밴쿠버를 수 없이 오고 갔다. 그때에는 밴쿠버 이민사회의 생존경쟁을 위한 이민자의 삶과 직업에 관해 단 1%의 관심도 없이 흘려보냈다. 그 당시에는 일종의 관광 모드로 오고 갔던 시간이었다. 막상 밴쿠버에 이주하여 실질적인 삶의 현장을 경험하고 부딪치다 보니 좀 더 심중 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민 결정을 했다는 것이 후회와 아쉬움으로 남는다.
한인 교민 사회에 신문 중 하나인 밴쿠버 조선일보는 유일하게 구인구직란에 활용가치가 있는 정보지로 명성이 높다.날마다 새로운 구직정보를 스크랩하는 구직활동은 일상적인 일이 되어갔다. 구인 광고란에는 업종도 다양하지만 대부분 요식업에 관련된 구인광고가 대부분이다. 집과 인접해 있는 지역에서 가드닝을 구한다는 모집광고가올라와 있다. 정원을 꾸미고 잔디를 깎는 일이 나름대로 적성에 맞을 것 같다는 생각에 전화를 걸어 인터뷰 시간을 잡았다. "이런 일을 해본 적이 있으세요"사장님은 보자마자 업무에 관련한 즉흥적인 질문을 던졌다.내 생애 노동현장에서 일에 본 적은 없었다."해 본 적은 없지만 일할 기회를 주시면 열심히 해보겠습니다"라고 큰소리로 자신감 있게 대답했다. 인터뷰는 별다른 내용 없이 몇 마디 물어보는 것으로 끝나버렸다. 사장님은 내일 아침 도시락을 지참하고 지정한 장소에서 만나 현장으로 같이 가지고 한다. 가드닝은 이민정착 후 처음 해보는 일이 되었다."메뚜기도 여름 한 철이다, "가드닝은 한 시즌에 일거리가 집중된 직업이기 때문에 안정된 직업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안정된 직업을 찾기 위해 고민하고 있을 때 밥의 말은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느낌 이상으로 귀를 강하게 흔들어 놓았다.
며칠 후 누군가가 문밖에서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밥이 집으로 찾아온 것이다. 밥은 별다른 설명도 없이 갑자기 자신의 차를 타라는 것이다. 차를 타고 동네 길을 돌면서 이전 한국에서의 직장생활과 사회생활에 대한 질문을 하여보았다. 밥의 질문하는 내용을 유추해 보면 창에서 회사 면접을 하는 것이 확실했다. 밥은 회사에 추천하기 위해 면접을 통해 추가로 참고해야 할 내용이 있었던 것 같다. 면접치고는 생전 들어보지도 못한 특별한 면접 방식이 활용되었다. 밥은 면접 질문을 끝내고 결과에 비교적 만족한 눈치인 듯했다. 출근 가능한 날짜를 물어왔다.
면접이 있고 이틀 후, 밥이 근무하는 회사로 출근하였다. 출근 첫날의 감정은 특별한 기대감이나 설렘임 보다는 두려움으로 첫 출근길을 나섰다. 무거운 마음으로 사무실 문을 노크했다.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사무실 사람들의 시선은 나의 눈에 날카롭게 부딪치고 있었다. 언어와 피부색은 물론, 사소한 모든 것들까지도 낯선 분위기이다. 마음이 극도로 긴장되었다. 사무실 문 앞에서 가까운 자리에 앉아 있는 직원에게 밥을 만나러 왔다고 했다. 현장에서 업무 지시 중이라고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한다. 몇 분 후 밥이 사무실로 들어왔다. 밥은 사무실 직원들에게 나를 소개하고 따뜻한 입사 환영 인사를 받았다. 밥이 임의로 채용을 결정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이 회사의 공장장이라는 직책을 가지고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사실을 출근하고 난 후 알게 되었다.
밥의 안내를 받으며 사무실 문을 통과하여 현장에 도착했다. 기계음에 뒤섞여 들려오는 언어 또한 내겐 이해할 수 없는 부호에 불과했다. 현장에는 캐네디언과 필리핀 계통의 인종이 전부였다. 필리핀인은 캐나다 사회 진입이 비교적 쉽다. 자국어와 함께 영어까지 구사하는 국가이기 때문이다. 일단, 회사 내부에는 한국인은 단 한 명도 없었다. 100% 영어로 소통이라는 압박감이 강한 부담감으로 찾아든다. 언어의 부재는 회사 생활에 다소 불편함이 있기는 하지만 회사 생활을 남들보다 성실하고 부지런한 자세에 비중을 두고 일을 하면 어느 정도 부족한 언어에 대해 직원 모두는 무겁지 않은 시선으로 봐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회사는 합성수지 샤시를 이용하여 창문을 만드는 회사이다. 생산된 제품은 전량 미국으로 수출 한다고 한다. 업무는 특별하게 주어지지 않았다. 어느 정도 회사 업무파악이 가능해질 때까지 현장에서 보조역활 수행 한다. 일종의 수습기간과 같다. 특별히 주어진 업무는 없었지만,초심을 잃어버리지 않게 다고 다짐하고 열정적으로 회사생활을 했다.
직장생활 12개월째로 접어들던 어느 날 자재 검수 업무를 담당하는 새로운 팀으로 이동하는 변화를 가져왔다. 기존에 해왔던 일과는 달리 비교적 노동 소모가 적은 일이다. 새로 옮겨간 팀에는 남자가 실종된 상태이다. 팀원 전체가 캐네디언 여성으로 팀을 이루고 있었다. 남자가 팀원으로 합류한다는 것이 왠지 여성의 성지를 침범하는 무법자 같은 느낌이 들었다. 팀장은 처음부터 특별한 업무지침이나 설명 없이 일을 진행하게 했다. 몇 주의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팀장의 태도에 변화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일과가 종료되어 갈 때쯤 일의 성과를 두고 꼬투리를 잡기 일쑤였다. 날이 가면 갈수록 질책의 수위는 높아져서, 결국 인내의 시간을 더는 버틸 자신이 없어 입사를 도와준 밥을 마지막으로 찾아갔다. 그동안 회사생활의 불편함과 고충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퇴사를 결정했다.
첫 직장에서 인종차별이라는 충돌 속에서 이민 시작부터 순탄치 않은 과정을 경험했다. 캐나다는 수많은 인종이 함께 살아가는 이민국가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캐나다 정부는 이민자들을 위해 인종차별만큼은 국가에서 엄중하게 법으로 다루고 있다.
캐나다에서 정상적인 첫 직장 진입은 그렇게 1년 2개월 만에 끝을 가져오고 말았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어느덧 캐나다 이민 10년째를 맞이하고 있다. 세월은 속절없이 흘렀다. 나에게는 이민 생활의 흔적을 더듬어 볼 수 있는 기억창고 같은 나침판이 있다. 나침판은 내가 서 있는 길의 위치를 정확히 안내해 주었다. 이민 초기 직장에서의 어려웠던 시간은 이민생활을 빠르게 숙성할 수 있는 면역력을 만들어 낸 원동력이 되었다. 지금은 모든 것이 낯설지 않은 익숙한 마음으로 과거를 회상할 수 있는 여유의 마음을 품었지만, 아직도 여전히 이민생활의 연습은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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