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한병에도 캐나다의 자존심이 담겨 있다

햇살 좋은 하루였다. 가벼운 배낭 하나 걸머지고 길 건너편 쇼핑몰로 향했다. 이곳 쇼핑몰 안에는 '리커 스토어(Liquor Store)'라는 주류 전문점이 있다. 캐나다는 일반 마트나 슈퍼마켓에서는 술을 팔지 않는다. 오직 주류 판매 허가를 받은 전문 매장에서만 술을 살 수 있다.

매장 안으로 들어서면 위스키부터 맥주, 와인까지 세계 각국의 술들이 진열대를 가득 채우고 있다. 정말 '술의 백화점'이라 불러도 좋을 정도다. 물론 그중에는 캐나다산도 많지만, 바로 이웃 나라 미국산 술도 적지 않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 오늘따라 진열대 한쪽이 이상했다. 일부는 검은 천으로 가려져 있고, 또 다른 쪽은 술이 빠져나간 자리에 안내문이 붙어 있다.

"BUY CANADIAN INSTEAD."

그 문구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번역하자면 '대신 캐나다산을 사세요'라는 의미인데, 여기서 '대신'이라는 말이 주는 느낌이 참 묘했다. 굳이 미국산 술을 언급하진 않았지만, 누구나 알아챌 수 있었다. '미국산 술 사지 말고'라는 말이 빠졌을 뿐, 그 속 뜻은 모두가 아는 것이다.

최근 미국과 캐나다는 관세 문제로 갈등을 겪고 있다. 트럼프 정부 시절부터 시작된 이 관세 전쟁은 철강과 알루미늄, 목재뿐만 아니라 농산물과 주류까지 번져나갔다. 미국이 캐나다산 제품에 높은 관세를 매기자, 캐나다 역시 맞불을 놓았다. 그 와중에 이렇게 '대신 캐나다산을 사라'는 안내문이 등장한 것이다.

사실 '미국산 술을 사지 마세요'라고 써붙였어도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캐나다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대신 '대신'이라는 단어 하나로 미국산을 겨냥했다. 직접적인 표현 없이도, 이 문구를 본 캐나다 사람들은 모두 그 뜻을 알아차린다. 어쩌면 이게 캐나다다운 방식일지도 모른다.

돌이켜보면 우리는 감정이 상하면 바로 상대를 지목하고 이름부터 부른다. '누구 때문이다'라는 말을 생활 속에서 너무 쉽게 한다. 그런데 캐나다는 이번만큼은 노골적인 표현 대신, '대신'이라는 단어로 감정을 전달하고 있었다. 오히려 그 여운이 더 오래 남는다.

진열대에 생산지 캐나다산를 표기해 놓았다

생각해보면 미국과 캐나다는 국경선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선 이웃이다. 오랜 세월 우호적 관계를 유지해왔고, 많은 캐나다인들이 미국으로 일이나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그런데 이렇게 관세 전쟁이라는 이름의 갈등 속에서, 두 나라 사이에 보이지 않는 감정의 강이 생기고 있다.

세계가 하나로 연결된 글로벌 시대라지만, 이런 작은 갈등 하나가 생활 속으로 스며드는 걸 보면 씁쓸해진다. 결국 서로 득보다는 실이 클 싸움일 텐데, 왜 이렇게까지 가야 하는지 모르겠다.

오늘 본 'BUY CANADIAN INSTEAD'라는 문구는 단순한 안내문이 아니었다. 이 작은 종이 한 장에 담긴 미묘한 감정, 그리고 나라 간의 갈등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술 한 병을 고르는 일상 속에서도 세상은 이렇게 우리 곁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참고 내용 (배경 설명용)

2025년의 새로운 관세 전쟁이 아니다.2018년에도 트럼프 정부 시절, 미국은 캐나다산 철강과 알루미늄 제품에 고율 관세를 부과했습니다. 이에 맞서 캐나다도 미국산 위스키, 와인, 오렌지 주스 등 다양한 제품에 보복 관세를 매기며 갈등이 심화됐습니다. 특히 미국산 버번 위스키가 타깃이 되어 많은 캐나다 주류 매장에서 '미국산 대신 캐나다산을 사자'는 캠페인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이때부터 'BUY CANADIAN INSTEAD'라는 문구가 눈에 띄게 등장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