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의 이름표, 군번줄은 아직도 빛난다

장롱 속에서 다시 만난 군번줄, 그 안에 담긴 시간들이 있다.

어제는 아내가 장롱을 정리하다 낯익은 물건 하나를 내게 건넸다.
“이거, 당신 거 아니에요?”
손에 들려진 건 군번줄이었다.

순간 멍해졌다. 내 것이 맞았다. 그런데 왜 그것이 아내 장롱 서랍 깊숙이 들어 있었을까.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예전 소품들을 정리하다가 어디선가 함께 아내가 사용하고 있는 장롱 속 서랍으로 묻혀 들어간 모양이다.

그 군번줄을 손에 쥔 순간, 차갑고 묵직한 금속의 촉감이 손끝에서 전해져 왔다.
청춘의 이름과 숫자들이 새겨진 그 작은 조각 안에 수많은 시간이 갇혀 있었다.

책상 위에 올려놓은 군번줄스테인리스 군번줄. 청춘의 이름과 시간이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

아내가 내 손을 바라보며 살짝 미소 지었다."이거, 당신 젊었을 때 이야기 아니에요? 그때 군대 생활은 어땠어요?”

나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군대에서 겪었던 고단함, 동료들과 나눴던 웃음과 눈물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밤 늦게 조용한 막사에서 서로의 고민을 털어놓던 기억,힘든 훈련 뒤에 지친 몸을 이끌고 함께 걸었던 그 길,전역이 연기되어 쌓였던 답답함과 불안감,그리고 그 안에서 조금씩 단단해져 갔던 나 자신까지.

그 모든 감정이 오롯이 이 군번줄 하나에 담겨 있었다.

“그땐 진짜, 시간이 너무 안 갔었지.”
내 목소리에 지난 세월의 무게가 묻어났다.“국방부 시간은 거꾸로 매달려도 간다”는 말이 그때는 정말 실감났다.

매일 똑같은 일상이 반복되는 것 같다가도, 한순간에 모든 게 무너져 내릴 것만 같던 그 긴 밤들이 있었다.

전역한 1986년 6월은 원래보다 두 달 늦어진 때였다.86 서울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군 전체가 비상 근무 체제에 들어가면서 전역 일정이 일괄 연기됐던 것이다.

그때 연기된 두 달은 마치 2년처럼 길고 무거운 시간이었고,국방부 시계는 정말 거꾸로 매달린 듯했다.

전역 연도만 따지면 올해로 39년.하지만 1984년 초 입대를 기준으로 하면 군 생활만 딱 40년이 넘는 세월이 지났다.
손가락을 접어가며 다시 계산해 봐도 틀림없었다.

청춘의 한 시절이 어느새 지나가고,중년의 나이를 훌쩍 넘긴 40년이 넘은 세월이 내 앞에 서 있었다.

군번줄. 요즘은 ‘인식표’라는 말이 공식적으로 쓰인다.물론 그 당시에도 ‘인식표’라는 말은 있었지만, ‘군번줄’이 훨씬 더 익숙하고 대부분 그렇게 불렀다.
그 시절, 우리는 그것을 ‘개줄’이라 부르기도 했다.

영어로는 ‘Dog Tag’라고 한다.직역하면 ‘개의 꼬리표’다.군인의 신원을 식별하기 위해 목에 거는 표식이라는 점에서,개에게 다는 꼬리표와 닮았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Dog Tag’라는 말을 들은 군인들은 자연스럽게 한국식으로 ‘개줄’이라 불렀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받아들였다.요즘 들으면 다소 거칠게 들릴 수도 있지만, 그때는 실용적 의미에 약간의 군대식 유머가 더해진 말이었다.나에게도 불쾌한 느낌보다는 정감 있게 남아 있다.

내 손에 들려 있는 이 군번줄은 스테인리스 재질이다.이름과 군번, 혈액형이 선명하게 각인돼 있다.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표면의 광택은 거의 바래지 않았고, 글자 또한 또렷하다.
그 차갑고 묵직한 감촉은, 내 청춘의 무게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듯하다.

그 군번줄을 서랍에 다시 넣으려다 문득 생각을 바꿨다.책장 위 조명 스탠드에 곰인형을 걸어둔 자리에, 군번줄도 함께 걸었다.

책장 위 스탠드에 곰인형과 함께 걸린 군번줄. 과거와 현재가 나란히 걸려 있다.

햇살이 비칠 때면 조용히 흔들리는 그것을 바라보면서마치 시간이 잠시 멈춘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번달에는 6,25한국 전쟁 기념일이 있는 달이다.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이곳에서 바라보는 6.25는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6.25는 단지 전쟁의 시작일 뿐 아니라, 한 세대의 기억과 상처,그리고 평화에 대한 간절한 염원을 상징한다.

군번줄도 마찬가지다.그 작은 금속 조각 속에 담긴 것은 단지 신분을 확인하는 정보만이 아니라,그 시절의 젊음과 두려움, 희망과 인내의 이야기다.

내게 군번줄은 과거와 현재를 잇는 다리와 같다.그것을 바라볼 때면,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내가 한 공간 안에 나란히 서 있는 듯하다.

시간은 흘렀지만, 기억은 여전히 내 하루 속에 조용히 머무르고 있다.군번줄 하나가 열어준 40년 전 기억의 문은, 오늘도 조용히 나를 과거로 데려간다.

그리고 그 문 너머로,아직도 배워야 할 삶과 평화의 의미가 희미하게 빛나고 있다.

글 요약 설명글
장롱 속에서 우연히 다시 마주한 군번줄 하나가 40년 전 청춘의 기억을 소환합니다. 군대에서의 시간, 늦어진 전역, 동료들과의 우정, 그리고 그 시절의 감정들이 군번줄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글은 군번줄을 통해 과거와 현재를 이어보며, 6.25의 의미와 평화에 대한 성찰까지 담아냅니다. 작지만 깊은 상징이 된 군번줄을 바라보며, 지나간 청춘과 오늘의 내가 조용히 마주 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