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외에서 가볍게 먹는 라면 한 그릇에도 기억이 스며든다는 걸 새삼 느낀다

야외에서 가볍게 먹는 라면 한 그릇에도 기억이 스며든다는 걸 새삼 느낀다

비 오는 날은 마음이 조금 느슨해진다. 흙내음 섞인 공기, 젖은 나뭇잎 사이로 흐르는 빗물, 그리고 그런 풍경을 가만히 바라보는 느린 시간. 그런 하루, 우리는 따뜻한 라면 한 그릇이 주는 소박한 위로를 떠올렸다. "비 오는 날 라면"이라는 익숙한 조합이 낯선 이국의 풍경 속에서 마주한 소호한 행복은 다시금 특별해졌다.

며칠 동안 이어지던 화창한 봄 날씨가 다시 비로 바뀌었다. 핸드폰엔 일주일 내내 비 예보가 떠 있고, 회색 구름은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다. 하지만 밴쿠버의 봄이 원래 그런 걸 알기에, 이제는 비 소식에 크게 민감하지 않다. 다만 아쉬움은 남는다. 좋은 계절에 누릴 수 있는 자연의 혜택이 조금 덜어지는 듯한 느낌 때문이다. 그래도 이곳에선 비조차 일상의 일부다. 우리는 그저 자연의 순리를 받아들이며 살아간다.

아침, 창밖을 내다보니 하늘은 잔뜩 흐렸지만 비는 잠시 멈춘 듯했다. 일기예보는 여전히 비를 예고했지만, 지금 몇 시간쯤은 걷기에 무리는 없어 보였다. 비가 다시 내리기 전, 잠깐이라도 산책을 해보자며 가볍게 외출을 준비했다. 오랜만에 공원 데크에서 라면으로 아침을 해결해볼 생각에, 배낭엔 코펠과 버너, 라면, 그리고 김치도 챙겼다.

현관을 나서자, 겉보기엔 비가 그친 듯했지만 얼굴에 닿는 가느다란 실비가 느껴졌다. 거의 보이지 않을 만큼 가늘었지만, 이미 마음을 정한 우리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자주 가는 공원은 비를 피할 만한 장소가 없기에, 라면을 끓이기 좋은 데크가 있는 다른 공원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곳엔 비 오는 아침임에도 산책하거나 운동하는 사람들이 꽤 눈에 띄었다. 하지만 우리가 도착한 데크엔 아무도 없었다. 다만 그곳이 공원 입구에 가까워 라면을 끓이는 우리의 모습이 고스란히 사람들의 시선에 노출된다는 점이 조금 신경 쓰였다. 나만 그런 줄 알았는데, 아내도 같은 생각이었다.

결국 또 다른 공원이 떠올라, 차를 타고 외곽에 있는 캠핑장과 강이 함께 있는 공원으로 향했다. 드라이브도 할 겸 30분쯤 달렸다. 캠핑장과 함께 있는 곳이라면 라면을 끓여 먹는 것도 자연스러울 것 같았다.

공원에 도착하니 다행히 비는 맞아도 괜찮을 정도로 약했다. 강가를 바라보는 오픈 데크에 자리를 잡고, 버너에 불을 붙였다. 산책로엔 반려견과 함께 걷는 이들이 드문드문 보였지만, 우리가 있는 자리와는 거리가 있어 시선을 의식하지 않아도 되었다. 곧 물이 끓고, 따끈한 라면이 완성되었다. 싸늘한 날씨에 뜨끈한 라면 국물은 그야말로 제격이었다. 강과 숲을 배경 삼아 먹는 라면은 그 자체로 별미였다.

야외에서 먹는 라면 하나에도 기억이 담길 수 있다는 걸 새삼 느낀다. 오늘 먹은 이 라면도 오래도록 기억 속에 머물 것이다.

누군가는 이런 날씨에 라면을 끓여 먹는 걸 두고 “청승”이라 말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에겐 운치 있는 시간이 분명했다. 낭만은 누군가가 만들어주는 게 아니라, 내 안에서 스스로 자라나고 피어나는 감정 아닐까. 마음이 평화롭다면, 그 순간이 곧 최상의 시간이다.

식사를 마치고, 준비해간 믹스커피로 야외 아침을 마무리했다. 평소 집에선 블랙커피만 마시는 아내도, 야외에서는 달달한 맥스커피를 찾는다. 이런 순간엔 한국인이라는 게 괜히 자랑스럽다. 이렇게 합리적이고 간편한 음식들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데크에서 여유를 즐기던 중, 다시 빗줄기가 굵어지기 시작했다. 하늘이 잠시 비를 멈춰준 것이 고맙게 느껴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번엔 제법 굵은 비였다. 땅에 부딪히는 소리가 날 정도는 아니었지만, 우산 없이 걷기엔 꽤 많은 양이었다.

짐을 차에 두고 트렁크에서 큰 골프 우산을 꺼내 들었다. 우리는 인적 드문 강변 산책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아내가 팔짱을 끼워왔다. 나이 탓일까, 감성 탓일까, 아니면 다시금 피어난 애정 탓일까. 그 느낌이 어딘가 낯설고, 조금은 어색했다. 어쩌면 어떤 이유도 아닌, 단지 “오랜만”이라는 시간의 틈이 만들어낸 거리감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걷던 중, 오래된 사과나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공원에서는 보기 드문 작은 안내판이 붙어 있었다.

1900년에 심어진 나무라고 했다. 햇수로 125년을 살아온 나무. 줄기 전체는 짙은 이끼로 덮여 있었고, 세월의 주름을 꾹꾹 눌러 담은 듯한 모습에 우리는 한참을 바라보았다.

이끼는 처음엔 나무와 함께한 오래된 친구처럼 느껴졌지만, 곧 생각이 바뀌었다. 이끼는 동시에 나무의 생명을 위협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비가 잦고 습한 숲에서는 모든 식물에게 이끼는 천적이 된다. 125년을 꿋꿋이 버텨온 나무조차 이끼라는 복병 앞에선 자유롭지 못하다. 어디든 마냥 평온할 수만은 없는 것이 자연, 그리고 삶의 이치다.

우산을 받쳐 들고 한참을 걸었다. 비 오는 날의 산책은 의외로 참 좋았다. 그동안 비가 온다는 이유만으로 미뤄뒀던 산책들. 오늘은 산책 겸 라면 한 그릇의 일념이었는데, 오히려 라면 겸 산책이 되어 우리를 밖으로 이끌었고, 덕분에 아주 특별한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누군가는 이런 하루를 “청승”이라 부르겠지만, 내게는 또 하나의 소중한 행복이었다. 비를 맞으며 걷고, 나누고, 웃었던 그 시간은 오래도록 마음에 남을 따뜻한 기억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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