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나물국, 캐나다 식탁 위, 엄마의 콩나물국이 그리운 밤

콩나물국, 캐나다 식탁 위, 엄마의 콩나물국이 그리운 밤

오늘 저녁,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던 중 콩나물국이 문득 떠올랐다.
이민자의 식탁에서 콩나물은 흔치 않지만, 추억 속에는 선명하다.
부엌 한켠 시루에서 자라던 콩나물, 어머니의 맑은 국물 맛이 떠올랐다.
오늘의 저녁은 단순한 끼니가 아니라, 기억을 끓여낸 시간이었다.
그 국물 속엔 어릴 적 부엌과 어머니의 뒷모습이 담겨 있었다.

오늘 저녁은 유난히 고민스러웠다. 평소처럼 냉장고 문을 열고, 눈에 띄는 재료로 대충 한 끼를 때울 수도 있었다. 아내가 가끔 "내일은 뭘 해 먹지?"라고 말할 때면, 속으로 ‘내일 것까지 벌써 걱정하네’ 싶었던 내 태도도 떠올랐다. 그럴 때마다 나는 늘 같은 대답을 했었다. “아무거나.” 지금 생각해보면, 묻는 사람 입장에서 참 허무한 대답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문득, 60년 넘게 살아온 기억의 식탁을 뒤적이다가 ‘콩나물국’이 떠올랐다. 문제는 재료였다. 집 근처 월마트엔 숙주는 있어도 콩나물은 없었다. 수요가 없으니 공급도 없는 셈이다. 외국인들에게 콩나물은 낯선 식재료라는 뜻이기도 하다. 결국 차를 타고 3km 떨어진 한인 마트까지 다녀와야 했다.

음식을 만들다 보면 어김없이 과거가 따라온다. 음식 속엔 무궁무진한 추억의 잔상이 묻어 있다. 그래서 나는 누군가에게 잊고 있던 시간을 되살리고 싶다면, 직접 음식을 만들어보라고 말하곤 한다.

어릴 적, 우리 집 부엌 한켠에는 투박한 옹기 시루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속에서 하얀 콩나물들이 쑥쑥 자라났다. 시루 위엔 깨끗한 면포가 덮여 있었고, 하루에도 몇 번씩 물을 부어 주었다. 시루 아래로 물이 ‘쫄쫄쫄’ 흘러내리는 소리는 마치 콩나물이 잘 자라고 있다는 안도감처럼 들렸다. 며칠만 지나면 시루는 금세 하얗고 탐스러운 콩나물로 가득 찼고, 우리 식탁엔 콩나물 무침, 콩나물밥, 콩나물국이 자주 올라왔다. 그땐 너무 자주 먹는 것 같아 지겹기도 했지만, 이제 돌이켜보면 그건 정성과 마음이 오롯이 담긴 반찬이었다.

성인이 되어서는 “이젠 안 먹어”라며 외면하던 콩나물국을, 술 마신 다음 날이면 해장국으로 다시 찾았다. 담백하면서도 속을 편안하게 달래주는 그 국물 맛은, 몸뿐 아니라 이민자의 마음까지도 위로해주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우리 식탁에서도 콩나물은 사라졌다. 대신 생선, 고기, 갖가지 신선한 야채들이 차지했다. 그렇게 이민자의 밥상도 어느새 달라져 있었다.

내게 콩나물국은 단순한 한 끼 식사가 아니다. 콩나물이 자라던 그 속도만큼, 내 꿈도 자라나던 어린 시절의 상징이다. 한국인의 밥상에는 혼이 담긴 음식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소박하고도 서민적인 혼의 맛은 콩나물국이 아닐까 싶다.

오늘은 마트에서 사온 콩나물을 꺼내 깨끗이 씻었다. 흐르는 물에 여러 번 헹구며 이물질을 털어냈다. 껍질이 반쯤 벗겨진 콩나물, 껍질이 그대로 붙은 콩나물도 있었지만, 그 하나하나를 손끝으로 집어 다듬는 시간이 어쩐지 소중하게 느껴졌다. 상한 것은 없는지 살피고, 껍질을 벗기고, 골라내며 조용히 집중했다. 번거롭지만 마음이 가라앉는 그런 시간이었다.

손질을 마친 콩나물은 체에 밭쳐 물기를 빼고, 그 사이 다시마로 육수를 냈다. 다진 마늘, 고춧가루, 소금으로 간을 맞추고 콩나물을 넣었다. 마지막으로 송송 썬 파와 청양고추를 더해 칼칼함을 더하고, 계란 하나를 풀어 넣자 소박하지만 뜨끈한 콩나물국이 완성됐다.

어머니가 끓여주신 콩나물국은 고추 하나 들어가지 않은 맑고 순한 맛이었다. 자극적인 맛 하나 없이도 속이 풀리고 마음까지 따뜻해지는, 그런 국물이었다. 은근한 단맛과 깊은 맛이 배어 있어 먹을수록 편안한, 어머니의 손맛이 담긴 국이었다.

반면 오늘 내가 끓인 콩나물국은 해장국에 가까운 얼큰한 맛이었다. 다진 마늘, 고춧가루, 청양고추까지 더해져 속을 확 풀어주는 칼칼한 맛이 중심이었다. 어머니의 그 조용한 국물 맛과는 다르지만, 국물을 한 숟가락 뜨는 순간 어머니의 손길이 어렴풋이 느껴졌다. 맑진 않았지만, 그 안엔 기억이 스며 있었다.

비록 어머니의 손맛엔 미치지 못했지만, 오늘의 콩나물국은 내 입으로 90%쯤은 도달했다 자평한다. 그 국물을 음미하는 동안,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그 시절 부엌과 어머니의 뒷모습이 조용히 떠올랐다.

오늘 저녁은 단순히 배를 채우는 시간이 아니었다.밥상에 앉아 한 그릇의 국을 마시며, 잊고 지냈던 기억과 마주했다.
오늘은 ‘무엇을 먹었느냐’보다, ‘어떤 기억을 먹었느냐’로 남을 날이다.